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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개종교육 ③] 종교인이 바라본 개종교육

종교기획 2010/06/16 16:47 Posted by 뉴스(news) 뉴스천지

http://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47024

2010년 06월 16일 (수) 10:29:51 뉴스천지 newscj@newscj.com


금선사 주지 법안스님(전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위원)

   
종교계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성스럽게 살아야 하는 종교계에서 인권이 유린되는 상황이 어떻게 연출될 수 있는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인권침해는 어떠한 경우라도 발생해서는 안 된다. 인권에 대한 올바른 생각을 가져야 한다. 종교계에서 그런 일이 저질러지다니, 종교인이라는 것이 의심스럽다.           

 


종교자유정책연구원 박광서 상임대표

   
2년 전 대법원이 개종을 빌미로 부녀자를 감금, 협박한 목사와 신도들에 대해 형사적 책임을 물어 실형을 선고한 바 있다.

심지어는 일부 목사와 정신과 의사들이 주도해 한 개인을 가족 동의만으로 이단으로 몰아 쉽게 정신병원에 강제입원 시키거나 개종강요하면서 돈벌이까지 한다는 얘기마저 있어 사회적 논란이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헌법은 종교자유를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고, 종교자유란 어떤 종교를 믿을 자유뿐 아니라 믿지 않을 자유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종교선교의 자유도 있다.

그러나 선교라는 적극적인 행위의 경우는 상대가 있기 때문에 그 상대의 기본권이 지켜지는 한도 내에서만 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종교를 강요하는 수준을 넘어 납치·감금·폭행까지 서슴지 않는 야만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당연히 나서야 한다.

정교분리는 이런 폭력적 상황까지 종교라는 이름으로 묵인하면서 지켜보라는 뜻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행위에 대해 공권력은 귀찮다는 듯이 개입을 꺼리는 경향마저 있어온 것이 사실이다.

이제 달라져야 한다.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종교적 신념으로 인해 폭력을 당해서는 안 되는 사회가 되어야 하고, 국가는 종교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되 종교 간, 사인(私人) 간, 심지어는 가족 간에도 폭력적 상황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음습한 종교인권 사각지대를 치유하지 않고 선진국 진입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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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이런 인권유린적인 강제 개종이 있다니 믿을 수 없고 정부는 뭐하는 것인지...의문입니다.

http://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47023

2010년 06월 16일 (수) 10:29:19 뉴스천지 newscj@newscj.com
   
▲ 박상익 씨 ⓒ천지일보(뉴스천지)
인터뷰- 개종교육 피해자 박상익 씨
강제납치ㆍ정신병자 취급까지… 인권유린 현장

헌법에 보장된 신앙의 자유를 비웃듯 한국에서 인권을 유린하는 강제개종교육 피해 사례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20조에서는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라고 하여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종교의 자유는 자신의 의사에 따라서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그 자유의 범위는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 종교에 대한 신앙을 강요받지 않을 권리, 종교를 가지지 않아도 되는 권리를 말한다.

그런데 어떻게 강제개종교육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인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이 문제를 알아보기 위해 수소문하던 중 어렵게 강제개종교육 피해자와 통화할 수 있었다. 


◆깨어보니 수갑 채워져

신천지예수교회(신천지) 교인인 박상익(31, 사진) 씨를 신천지 총회본부가 있는 경기도 과천에서 만났다.
“명절 때 커피 먹고 잠이 들었어요. 깨어보니 차 안이었고 손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죠. 자세히 보니 어머니의 손에도 수갑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차는 어디론가 가고 있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부모님에게 강하게 항의했어요. 아버지는 납치를 배후에서 조종한 개신교 목사와 전화 통화를 했고, 목사는 그런 상태로는 개종교육이 어려우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해서 결국 집으로 돌아오게 됐죠.”

신천지 교인 박상익 씨의 간증이다. 개종목사들의 지시에 따라 가족들이 명절을 기해서 그를 납치해 강제개종교육을 받게 하려 했다가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박상익 씨는 “아버지가 이런 일을 꾸밀 분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돈을 목적으로 계획적으로 접근한 개종목사들에게 속은 것이다. 아버지의 생각과 의지가 아니라 개종시키는 목사에 의해 조종 받았던 것으로 볼 수 밖에는 없다”면서 “우리 가족의 내용이 PD수첩을 통해 방송에 나간 후로 아버지도 고향을 떠나셨고 나도 고향을 떠나게 됐으며 친구도 많이 잃게 됐다”고 울분을 토했다. 이어 “가족 간의 단순한 갈등의 문제를 마치 큰 문제나 있는 것으로 의도적으로 편집·방송한 MBC, 방송이 나가도록 허위내용을 제보한 개종목사와 개종사업자는 회개하고 공개사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천지예수교회는 최근 교세가 급성장한 곳으로 개신교계는 물론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먼저 박상익 씨에게 신천지 입교동기를 물어봤다. 호주 유학 중 한국에 잠깐 다니러 왔다가 우연히 신천지를 알게 됐다는 그는 “신앙하면서 답답하고 궁금했던 것 모든 것이 신천지에서 풀려진 것이 가장 큰 동기”라고 말했다.

신천지 입교 후 생활에 변화가 있었냐는 질문에 “신천지에 와서 말씀의 중요성을 깨닫고 신앙생활의 올바른 기준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직접 찾아간 개종교육

그의 아버지는 장로다. 그는 “아버지가 목사들로부터 신천지를 비방하는 말을 듣게 됐다.  ‘아들을 신천지에서 빼내려면 무조건 개종교육을 받게 해야 한다’는 목사들의 말에 아버지는 세뇌 당했다. 그런 아버지와 정상적인 대화는 불가능했다”면서 “신앙의 자유를 주시면 집에 들어와 가족과 함께 살겠다”고 말했다 한다. 아버지는 개종교육을 받을 것을 권유했고 박 씨는 “내 발로 신천지에 갔으니 개종교육을 받더라도 내 발로 가겠다”고 했다.

박 씨의 완강한 저항으로 강제개종교육이 무산되자 가족 간 갈등의 골은 깊어갔다. 시간도 많이 흘러갔다. 그는 가족의 화평을 위해 아버지께 제안했다. 개종교육을 스스로 받으러 갈 것이니 종교의 자유를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피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했고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진리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에 개종교육을 가겠다고 자진했다. 또한 개종목사들에게 가족들이 더 이상 속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가족들을 보호하는 마음에서 결정했다”고 스스로 개종교육을 간 이유를 설명했다.

개종교육의 내용을 묻자 박 씨는 “경기도 안산○○교회에서 열흘, 신천지에서 공금횡령 사실이 적발된 후 배도하고 나간 신 목사에게 이틀 교육받았다. 말씀에 대한 교육이 아니라 한 사람을 상대로 개종목사, 부모님, 개종목사 교회 교인들이 합세해 이구동성으로 ‘너는 잘못했다’라고 몰아붙이는 인신공격이 교육내용의 전부였다”고 밝히면서 “나에게는 발언 기회를 주지도 않았으며 원하지 않는 교육동의서를 강제로 작성하게 하고 일체 다른 사람과 연락을 하지 못하도록 핸드폰 사용을 통제하며 외출을 금지시키는 등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했다”고 강하게 비판하며 이러한 모든 것들은 심각한 인권유린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에서도 강제개종교육을 시키기 위해 납치·감금 사건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본 개종 피해자들과 연대해 강제개종교육으로 인한 인권유린 문제를 국제사회에 호소할 뜻이 있다”며 “필요하다면 일본피해자들과 합동기자회견도 열 수 있다”는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개종교육 피해 여전

지금도 알게 모르게 강제개종교육이 진행되고 인권유린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한 박상익 씨는 “개종목사의 지시를 받은 부모가 딸을 정신병원을 데려가 진단(입원 필요)을 받게 하고 멀쩡한 자녀를 정신병자 취급한다. 밤 9시 이후 부모의 감시 하에 산책을 조금하는 것을 빼놓고는 하루 종일 방에 감금한다”면서 정신병원에서 교묘한 방법으로 인권이 유린당하고 있는 한 자매의 피해사례를 소개했다.

역시 개종목사의 지시를 받은 남편과 친정가족들이 한 여자 집사를 납치ㆍ감금한 사건도 이야기했다. 외딴 산속 펜션에 20일간 감금돼 있다가 동맥을 끊고 탈출했던 예도 있다며 박상익 씨는 “얼마나 힘들었으면 죽음을 각오하고 동맥까지 끊을 수 있었겠느냐”며 성토했다.

배후에서 가족들을 선동하는 개종사업자들을 용서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들이 하는 짓이 죄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세상법이라도 사용해 강제개종교육을 위해 납치 감금하는 행위는 나쁜 짓이라고 깨닫게 하고 돌이켜 회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정으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한 박 씨는 강제개종사업자들에게 “음지에서 숨어 교묘하게 가족들을 속이며 불안에 떨지 말고 양지에 나와 흑백을 가리자”면서 “언론사 기자와 종교지도자를 초청해 참과 거짓을 밝히자”고 공개토론을 제안했다.

이어 “당신들의 말이 옳다고 판명되면 당신들을 따를 것이며 우리의 말이 옳다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신천지로 오라”면서 “그러나 자신들 스스로가 잘못된 것을 알고 있고 잘못된 것이 드러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공개토론을 피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끝으로 박상익 씨는 경찰과 검찰, 정부에 한마디 했다.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종교로 인한 인권 유린은 계속되고 있어요. 이러한 것을 지금까지는 가정문제로 취급해 관심을 갖지 않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가족을 이용해 자기의 이익을 얻으려는 개종목사들의 실체를 정확히 조사해 엄벌하고 다시는 이 땅 위에 종교로 인한 인권유린이 발생하지 않도록 세심한 관심을 가져 주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당하는 사람이 내 가족이라는 생각을 갖고 이 문제를 해결해 주길 다시 한 번 부탁한다”고 그는 당부했다.                     

<개종교육 피해자들의 호소>

#사례1.
대학 4학년 1학기를 마칠 즈음 신천지를 다닌다는 이유로 부모님이 기숙사에 와서 강제로 안산○○교회에 끌고가 개종교육을 시켰습니다. 약 한 달 반 동안 안산○○교회 근방 원룸에 갇혀 지냈고 사설경호원 3명을 붙여 감시하기까지 했습니다. 다행히 한 경호원의 도움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지난 후 부모님은 “신천지가 내 딸을 강제로 데리고 있다”며 시위를 하게 되었고 부모님이 고생하시는 모습을 볼 수 없어 다시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렇게 얼마간 지낸 후 마지막 2학기를 마치기 위해 학교를 다니려고 했더니 다시 강원도 어디론가 개종교육을 시키러 절 데려갔습니다.

이곳 저곳을 전전하며 개종교육을 받았고 마지막에는 구리 ○○교회 신 씨에게 개종교육을 받으며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 지나가는 사람에 의해 다시 구출되었는데, 또다시 부모님은 신천지가 내 딸을 감금했다고 거짓 시위를 벌여 그것을 중재하던 중 다시 집으로 끌려갔습니다.

부모님은 안에서 문을 못 열게 만들어 저를 가두고 더불어 강제로 정신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진료를 받게 했습니다. 정신은 멀쩡한데 마치 저를 병자 취급하는 부모님을 보면서 이건 부모님의 생각이라기보다는 뒤에서 개종목사들이 사주를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왜냐면 다른 청년들처럼 똑같은 패턴으로 당하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아는 이의 도움으로 다시 나오게 되었고 지금은 어떻게 이 현실을 헤쳐나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하루빨리 모든 진실이 드러나 종교의 자유를 얻고 싶고 개인의 인권을 온전히 찾고 싶습니다. 
신천지 교인 윤성희(가명)

#사례2.
저는 고3때 신천지에서 말씀을 배우기 시작했고 이곳이 너무 좋아 열심히 신앙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부모님께서 신천지에 나가게 된 것을 알게 된 후, 돌변하여 저를 안산○○교회 진 목사에게 끌고 갔습니다. 부모님은 핸드폰을 빼앗고 외부인과 연락을 단절시켰고 저는 강제로 ○○교회라는 곳에서 개종교육과 더불어 원치 않는 신앙을 하게 되었습니다.

웃고 싶지 않아도 웃어야 했고 울고 싶어도 울 수 없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말씀도 강제로 이해해야 했고, 조금이라도 제 생각을 말하면 부모님은 저를 때리고 협박하곤 했습니다.

원래는 화목한 우리 가족이었는데, 개종목사의 사주로 인해 어머니는 잘 다니던 학교선생님 일을 그만두었고 아버지 역시 일을 놓게 되어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집에서 맞고 혼나는 한이 있어도 신천지 신앙을 계속 해오고 있으나 항상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개인의 인권을 찾고 싶고 자유롭게 신앙을 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신천지 교인 김유미(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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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6월 16일 (수) 10:28:46 뉴스천지 newscj@newscj.com
   
▲ 고토 토로우 씨가 자신이 감금됐던 장소에  설치된 자물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12년 5개월 납치·감금 개종교육 폭로
통일교인 고토 토로우 씨 “일본 개종목사들 오직 돈이 목적이었다”

일본국 헌법 제20조는 ‘신앙의 자유는 어느 누구든 이것을 보장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헌법으로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헌법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반인륜적이고 반인권적인 만행이 일본 내 일부 개신교 목사와 좌익 성향의 변호사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다.
무려 12년 5개월 동안 가족들에게 납치·감금됐다 풀려난 한 남자가 있다. 그가 납치될 당시 나이는 32세로 혈기 왕성할 때였다. 182㎝의 훤칠한 키를 자랑하던 그가 납치·감금에서 풀려났을 때의 몸무게는 39㎏으로 초등생 5학년 수준이었다. 그는 감금 중 탈퇴설득 전문가들에 의해 온갖 굴욕적인 말로 매도당했고 친족 등으로부터 폭행을 당해 상해를 입었으며, 너무 괴로워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고토 토로우’다.


 그가 한국에 왔다. 마포 통일교 사무실에서 고토 토로우 씨를 만났다. 그에게 납치·감금 사건 내막을 들어봤다. 고토 토로우 씨는 먼저  “1963년 야마가타현 요네자와시에서 태어났으며 1987년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4월 타이세이건설 주식회사에 입사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고토 씨는 대학 4학년 때인 1986년 통일교 신자였던 형 ‘타카시’의 소개로 통일교에 입교했다. 그 후 형은 통일교회를 탈퇴했다고 한다.

통일교 입교 후 생활에 변화가 있었냐는 질문에 고토 씨는 “통일교 입교 후 크게 변한 것은 없다. 오히려 표정도 이전보다 더 밝아지고 성격도 좋아졌으며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도 생겼다”라며 “입교 전에는 전철에서 자리 양보도 잘 하지 않았지만 (입교 후엔) 전철을 타면 배려하는 마음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통일교 입교 후 정상적인 회사 생활을 하며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바뀐 고토 씨를 왜 납치·감금했는지 궁금했다.

고토 씨는 “부모님은 통일교에 대해 전혀 몰랐다. 언론을 통해 통일교를 접하고는 통일교 탈퇴 전문가를 찾아가셨다”고 말했다.

고토 씨의 납치·감금은 통일교를 이단으로 간주하는 개신교 목사들이 주도했다. 그 목사들은 가장 먼저 부모에게 통일교에 대한 근거 없는 나쁜 이야기, 왜곡된 이야기로 일정기간 교육을 한다. 이런 내용을 들은 부모는 자식이 걱정돼  자식을 구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되고, 결국 강제개종(改宗)전문목사(개종목사)를 찾아가 상담하게 된다.

개종목사는 부모에게 자식을 납치·감금해 설득시키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한다. 개종목사는

   
▲ 감금 당했다가 12년 5개월 만에 풀려났을 당시 고토 씨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부모에게 돈을 받고 구체적인 방법을 일러준 후 자신들이 직접 나서 납치·감금하지 않고 뒤에서 가족들을 조종만 한다. 개종목사들은 납치·감금 후 신자가 통일교를 탈퇴할 경우 그 신자를 자신의 교회로 출석하게 하고 헌금도 하게 한다. 일부 개신교 목사들은 돈을 목적으로, 좌익계 변호사들은 공산주의를 반대한 통일교를 없애려는 목적으로 부모를 이용해 납치·감금을 일삼고 있다.

고토 씨는 “가족들도 조종당한 피해자”라며 “개종목사들은 ‘축복결혼 후 한국으로 가면 행방불명된다. 정신병자하고 결혼한다. 한국에 가면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며 온갖 거짓말로 부모들을 협박한다”고 말했다.

또 “개종목사들은 부모들에게 구체적 이야기없이 ‘당신 아들은 지금 범죄하고 있다’고만 말한다”며 “만약 개종목사들이 하는 말이 사실이라면 ‘옴 진리교’처럼 통일교 법인이 취소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개종목사들은 부모들에게 ‘당신 자식이 전도를 하면 범죄자를 번식하는 것이라면서 자식을 설득하려면 감금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당신 자식은 통일교에 세뇌당해 스스로 판단 못한다. 통일교 간부들이 신자들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다’고 말한다”고 했다.

그러나 고토 씨는 “그것은 거짓”이라며 “통일교 신자 중에는 전도나 헌금을 하지 않는 신자도 있으며 탈퇴하는 신자도 있다. 부모들이 오히려 개종목사들에 의해 세뇌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건장한 체구인데 감금 당시 왜 탈출하지 못했느냐는 질문에 “이중삼중으로 설치된 잠금장치 때문에 탈출이 불가능했다”며 고토 씨는 감금됐던 곳에 설치된 잠금장치 사진과 감금됐던 장소의 평면도를 보여줬다. 또 여러 번 탈출을 시도했지만 오랜 감금생활로 체력이 떨어져있는 상태라 역부족이었다고 전했다.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히면 가족들이 이불을 뒤집어 씌우고 입을 막아 숨이 막혀 질식할 것 같았다. 옥신각신하다가 새끼손가락 뼈를 다쳐 2~3개월간 고생했다. 안간힘을 써서 탈출을 시도해도 붙잡힌 다음에는 감금상태가 더 엄해져 허탈감과 절망감이 엄습해왔다. 결국 힘으로 탈출하기를 포기했다”라며 “대신 21일간 단식투쟁을 두 번, 30일간 단식투쟁을 한 번 했다”고 간증했다. 고토 씨는 30일간 단식투쟁 후에 식사를 제공받지 못해 굶어죽을 지경에까지 갔었다고 한다.

2007년 11월 무렵 고토 씨의 형수는 “이 방을 유지하는데 얼마나 많은 돈이 드는 줄 아냐?”며 그를 비난했다. 고토 씨의 가족은 고토 씨를 장기간 감금하느라 어려움에 처하게 됐다. 가족들 사이에서도 감금을 더 이상 계속해야 하는지 그만둬야 하는지 의견이 나눠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 2명이 계속해서 고토 씨를 감시했다.

2008년 2월 10일 오후 4시경 형 형수 어머니 여동생이 고토 씨에게 “당장 나가”라고 소리쳤다. 당시 고토 씨는 몸이 너무 쇠약해 있었고 감금당시 빼앗겼던 지갑 등 소지품을 돌려받지 못했다. 고토 씨는 실내에서 입고 있었던 옷 그 상태로 내어 쫓겼다. 고토 씨는 걸어서 통일교 본부로 향했다. 도중에 파출소에 들러 차비를 빌리려했지만 부랑자로 오인받아 돈을 빌리지 못했다.

우연히 길에서 만난 통일교회 신자에게 돈을 빌려 택시를 타고 교회 본부로 갈 수 있었다. 이로써 고토 씨는 12년 5개월이라는 생지옥 같은 감금 생활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통일교 본부에서는 고토 씨를 곧 바로 병원으로 옮겼다. 입원 당시 부축을 받지 않고는 걸을 수 없었던 고토 씨는 재활훈련으로 몸을 추스른 후 입원 50일 만에 퇴원했다.

고토 씨는 “신앙을 버리게 하기 위해 12년 5개월이란 긴 시간 동안 사람을 감금하고 집단으로 정신적·육체적 학대를 가하는 행위는 고문이며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말했다. 이어 고토 씨는 “저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무시당하며 인생의 귀중한 시간을 망쳐버렸다”면서 “그런데 감금에 관여한 가족이나 개종업자 미야무라  씨는 조금도 반성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미야무라 씨는 감금됐던 장소가 자물쇠 등으로 잠겨져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고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토 씨가 감금 가운데에서도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감금을 한 사람들의 잔악한 행동을 보면 볼수록 악의 화신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고 한다. 또 고토 씨는 죽어도 저런 악에 가담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해졌고, 언젠가는 감금 현장에서 반드시 자유의 몸이 돼 이 악질적인 인권침해를 전 세계에 알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명감을 강하게 가졌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고토 씨는 현재 전 세계를 다니면서 인권전문가들을 만나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납치·감금의 실태를 알리고 있다. 납치·감금 사건은 단순한 가족·종교 문제가 아니라 헌법에 보장된 개인의 인권을 탄압하는 문제이다.

종교로 인한 납치·감금 사건이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다고 말을 들었다는 고토 씨는 한국 내 종교로 인한 인권피해자들과 연대해 전 세계에서 강제개종목사와 개종사업자가 없어질 때까지 투쟁할 것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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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속 종교]구름타고 축지법 쓰는 홍길동

종교기획 2010/01/23 15:39 Posted by 뉴스(news) 뉴스천지
http://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31870

2010년 01월 23일 (토) 10:17:49 백은영 기자 angel@newscj.com
   
▲ 허균의 <홍길동전>은 시대를 초월해 다양한 콘텐츠로 재탄생됐다.

만민이 평등한 이상향 ‘율도국’ 건국한 영웅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하지 못하니….”

이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웬만해서는 알고 있는 대사다. 종종 개그 프로에서도 인용되는 이 말은 조선시대 그 이름을 널리 알렸던 의적 홍길동의 대사다. 이미 홍길동이라는 인물이 있었음이 밝혀지기도 했지만 여기에서의 홍길동은 물론 소설 속 가상인물이다.

조선 광해군 때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은 정승의 아들로 태어나 학식과 인물이 뛰어났으나, 서얼로 태어난 탓에 천대를 받던 홍길동이 집을 나와 활빈당이라는 집단을 결성해 의적활동을 벌이다가 율도국을 건설한다는 내용을 담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이다.

이 소설은 당시 사회제도의 결함, 특히 적서차별(嫡庶差別)을 타파하고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려는 의도로 지은 사회소설로 민초(民草)들에게 작게나마 위로를 전했다.

만민평등사상을 갖고 활빈당 행수로 의적활동을 펼치는 홍길동은 어려서부터 도술을 익히는 등 심신을 수련했다.

만민이 평등한 세상, 즉 낙원(樂園)을 꿈꾸던 한 사람. 그러나 그의 꿈은 꿈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과 함께 율도국이라는 나라를 세우게 된다.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핍박받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의(義)를 위해, 만민이 평등한 낙원 같은 세상을 위해 불의(不義)한 사람들과 싸우는 의적 홍길동.

   
▲ 민중의 영웅으로 그려진 홍길동은 시대를 초월에 다양한 문화콘텐츠로 만들어졌다.(2008년 KBS 2TV에서 방영된 쾌도 홍길동)

소설 속 홍길동은 도교적인 둔갑법, 축지법(縮地法), 분신법(分身法), 승운법(乘雲法) 등 도술을 부리며, 양반들이 부당하게 취한 재물을 도로 찾아와 백성들에게 나눠준다.

그렇기에 그를 두고 사람들은 신출귀몰(神出鬼沒)하다고 말한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홍길동이 도적이면서도 사람들에게 추앙받는 이유는 모두가 같이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는 그의 생각에 있다

서양의 영웅, 즉 히어로들이 혼자만의 힘으로 악당과 맞서 싸워 영웅으로서 대접받는다고 한다면, 대한민국의 영웅은 서로 힘을 도모하고 뜻을 같이 해 하나의 이상향을 꿈꾼다.

또한 서양의 히어로들이 원래 타고난 부와 초능력의 힘으로 사람들을 돕는다며, 대한민국의 영웅들은 열악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수련(修練)을 통해 당당하게 세상과 싸워나간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을 지니고 있는 대표적인 영웅이 바로 ‘홍길동’이다.

허균의 소설 속 홍길동의 삶을 살펴보면 참으로 기구하다 할 수 있다. 가족이라 하더라도 ‘호부호형(呼父呼兄)’을 할 수 없었고, 가족의 품을 떠나 이상향을 꿈꾸는 길동이 가진 비범한 재주가 장래에 화근이 될까 두려워 길동을 죽이려고까지 했다. 도적의 소굴에 들어가서도 힘을 겨루어 두목이 됐으며, 특유의 기계(奇計)와 도술로 의적활동을 벌이게 된다.

어찌 보면, 당시 백성들에 홍길동은 새로운 세상을 여는 선지자였으며, 자신들을 차별과 빈곤에서 해방시킬 구원자였는지도 모른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이에게는 핍박과 고난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핍박과 고난을 이겨냈을 때 비로소 우리들이 찾던 낙원, 모든 이들이 꿈꾸는 이상향이 건설된다.

허균의 <홍길동전>은 바로 이러한 희망을 노래한 작품이고, 소설 속 홍길동은 희망을 이루어가는 주인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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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으로 마음 변혁할 때 세계 리드도 가능할 것”

국론이 분열되고 어지러운 가운데 2010년 새해가 밝았다. 지자체 선거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담 등 굵직한 이슈가 넘쳐나는 올해, 사회 화합과 종교 상생의 길은 무엇일까.

인제대 총장 등을 지낸 철학박사 이윤구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이하 이윤구)와 김동환 천도교 교령(이하 김동환)의 대화를 통해 정치인과 종교 지도자 그리고 국민의 역할은 무엇인지에 대해 천지일보 이상면 사장의 사회로 희망과 우려를 짚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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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19일 (목) 10:43:44 백은영 기자 angel@newscj.com
5공 시절 기독교내 진보적 세력 약화 위해 종교대책반 운영

한국 개신교를 대표하는 연합단체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CCK)를 들 수 있다.

NCCK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분이신 하나님을 주(主)로 고백하는 신앙운동, 선교를 위한 교회들 간의 유대와 연합운동,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 및 정의로운 사회구현을 위한 공동증언의 사업을 전개’ 하기 위해 1924년 9월 24일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로 창립돼 현재에 이르렀다.

이미 한국교회의 연합과 선교, 정의로운 사회구현을 위해 창립된 NCCK라는 연합단체가 있는 상태에서 또 다른 한국교회의 연합단체로 나타난 한기총의 탄생은 예사롭지 않다.

진정 한국교회가 하나가 되기를 바라고,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백성을 양육하는 목자로서의 의무를 최우선으로 생각했다면 서로 다른 두 연합단체가 존재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한국교회를 위해 탄생했다는 한기총의 탄생배경과 이들 단체가 한국교회를 위해 어떠한 사업을 펼쳐왔는지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한다.

◆한국교회 연합과 일치를 위해 vs 정치적 이유로 한국교회 분열 선택

한기총은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한기총의 탄생을 한국교회의 모든 교단을 하나로 묶어서 정부나 사회에 대해 한목소리를 내는 데 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한국교회에 주신 사명에 충실하기 위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으면서 연합과 일치를 이뤄 교회 본연의 사명을 다하는 데 일체가 될 것을 다짐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한기총이 말하는 한기총의 탄생과정은 다음과 같다.

한국교회를 하나로 묶어야 한다는 데 공감한 범 교단의 교회지도자들이 1989년 2월 9일 대전 유성에 모여 마음을 모았으며, 같은 해 4월 28일 한경직 목사 외 300여 명이 서울 영락교회 선교관에서 창립 준비위원회 총회를 가졌다.

이후 11월 29일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각 교단과 단체의 파송 대표 연석회의를 열어 창립총회 장소와 일정을 결정했다. 그 한 달 뒤인 12월 28일 서울 강남침례교회에서 창립총회를 개최, 36개 교단과 6개 단체에서 대표 121명이 참여해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탄생하게 됐다.

이런 한기총의 입장과는 다르게 이들의 탄생배경에 대해 많은 의혹들이 제기되고 있다. 한기총의 탄생이 순수하지 않다는 것이다.

백종국 교수는 한기총의 탄생이 한국교회의 분열을 대변하고 있다고 말한다.

백 교수는 “한기총은 1989년 2월 노태우 정권 퇴진 운동이 한창일 때에 유성에서 모인 20여 명의 각 교단 원로들에서 시작했다”며 “이들이 주창한 이 단체의 일차적 목적은 ‘한국 기독교의 연합’이었지만 매우 모순된 목표라고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 이유로 한국교계에는 1924년 9월에 수립돼 당시까지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라는 교회 연합체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들었다.

백 교수는 “따라서 이들이 새로운 조직을 만든 진정한 이유는 1989년 1월 7일자 <동아일보>가 보도하는 바처럼 ‘NCCK 내의 보혁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며 “기독교 내의 일부 보수적 세력들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민주화 지지 입장에 반대하기 위해 이 단체를 결성했으므로 정치적 입장 때문에 교회의 분열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고 꼬집었다.

◆무분별한 이단정죄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해 탄생했다고 주장하는 한기총은 창립목적과는 다르게 한국교회의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성경 안에서 하나가 되려고 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다고 상대를 ‘틀렸다’라고 말하며 저주하고 핍박하기를 일삼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교회를 어지럽히고 하나님의 말씀과 다르게 가르치는 곳이 있다면 마땅히 경계해야 하며, 한국교회에 주의를 요청해야 한다.

그러나 자신들의 생각과 교리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성경에 비추어보지도 않고, 앞뒤 정황을 살펴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권력을 남용해 이단이라 정죄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마치 한기총에 가입된 대형교단의 창시자인 칼빈의 행위를 그대로 따라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장로교의 창시자 칼빈이 제네바에서 종교국 수장으로 있을 당시 성경에 맞지 않는 ‘절대예정론’을 주장하며, 자신의 의견이나 교리에 반(反)하는 사람들을 ‘이단’과 ‘마녀’로 정죄하고 화형과 극형으로 죽인 일은 종교인을 떠나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바로 이러한 일들이 오늘날 종교세계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그것도 한국교회를 대표한다는 연합단체인 한기총이 앞장서서 ‘이단’이라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을 일삼고 있다.

성경 어디에도 형제와 싸우고, 저주하고, 비판하고, 판단하라는 말은 없다. 이들이 말하는 ‘이단’이 과연 어디인지 알아봐야 할 것이다.

초림 예수님께서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향해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했지만 정작 자신들이 마귀의 자식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들이 정통이라 생각했겠지만 그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는 전통이었을 뿐이었으며, 당시 정통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예수님이었다. 이렇듯 정통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곳이며,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자는 남을 저주하거나, 핍박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사랑으로 하나님의 양들을 양육하며, 또한 하나님은 말씀이시니 그 말씀대로 행하는 자가 정통이며,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곳이 정통임을 알아야 한다. 말씀이 없고 핍박과 저주를 일삼는 곳은 결코 정통이 될 수 없다.

◆한기총은 종교대책반의 결과물

모 언론은 보수단체인 한기총 등 5공과 6공 정권 당시에 탄생한 보수단체들이 종교대책반 활동의 결과물이라는 내용의 기사를 보도한 바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오충일 목사가 ‘국정원과거사진실규명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진실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대해 백 교수는 “한국교회의 분열이 교회 외부의 정치세력들에 의해 촉발된 것이 아니냐 하는 의구심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며 “<뉴스앤조이>나 <시민의신문>과 같은 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전두환 정권 초기부터 5공화국 세력들이 기독교 내 진보적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종교대책반을 운영하고 보수 온건세력의 조직화를 지원했음을 입증하는 문건이 확인됐다고 한다”고 전했다.

이는 <뉴스앤조이>의 박철언 씨 인터뷰에서도 확인됐으며, 국정원과거사진실위원회 위원장인 오충일 목사에 의해서도 확인된 바 있다.

백 교수는 “오 목사는 당시 안기부의 종교담당 요원이 한기총 창립에 구체적으로 개입했다고 밝혔다”며 “물론 이 단체의 창설에 참여한 분들의 인격을 생각해 볼 때에 외부 세력의 공작이 한기총 창설의 유일한 요인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신중함을 내비쳤다.

◆집권세력 지지를 위해 동원된 기독교 보수세력

한편에서는 ‘한기총의 뿌리가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당시 삼선개헌을 지지하는 보수세력들을 결집시키려는 김종필의 정치적인 계획에 따른 보수 기독교인들의 결집이다’라는 주장이 일고 있다.

백 교수는 이에 대해 “1969년에 발생한 삼선개헌 사건과 1989년에 창설된 한기총을 바로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면서도 “구태여 ‘뿌리’를 따진다면 삼선개헌이나 10월 유신 혹은 전두환의 군사 쿠데타와 같은 정치적 변동기에 집권세력 지지를 위해 동원됐던 기독교의 보수적인 세력들을 들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보다 더 멀리는 일제하에서 현실론을 내세워 신사참배를 받아들였던 기독교 세력을 들 수 있겠다”며 “어느 시대에나 정치권력은 종교를 지배의 외피로 삼고자 노력했다. 또한 인류 역사는 종교가 정치권력의 정당화를 위해 봉사하면 반드시 부패하고 타락했다는 사실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한국 기독교가 바로 서려면 보편타당한 기독교적 가치의 실현 외에 특정한 정치적 목적으로 교회가 악용되는 일은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교회 위한 한기총의 선택

한기총은 탄생부터 지금까지 극우적인 정치활동에 몰두하므로 교회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복음의 문을 가로막았다.

백 교수는 이를 두고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으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고도 할 수 있다”며 “이는 현재 한국사회의 종교인구가 늘고 있는 데 반하여 유독 한국교회만 질적 차원과 양적 수준에서 쇠퇴일로를 걷고 있는 모습에서 잘 증명된다”고 꼬집었다.

이러한 이유로 백 교수는 “한기총을 해체하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발전적으로 통합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고 피력했다.

그는 “물론 현 시국의 정치 지형을 생각하면 한기총의 정치적 입장이 다수라고 보지만 민주화와 복지화라는 역사의 방향을 볼 때에 한기총의 입장은 결국 소멸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며 “한기총과 함께 한국교회가 소멸되지 않으려면 한국교회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어 “궁극적으로 개별 교단을 해체해 교회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 가장 좋다”며 “대의정치의 해법에서처럼 최대한 중간 단계를 없애고 성도 개개인의 의사가 신속히 반영되고 존중되는 새로운 형태의 ‘한국기독교총회’를 구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고 의견을 제시했다.

마지막으로 “한국교회가 지금까지의 태도를 회개하고 한기총식 정치가 초래할 암울한 미래를 극복하기로 결단한다면 한량없이 자비하신 주님의 은총으로 이러한 결과를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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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9월 09일 (수) 10:45:44 박준성 기자 pjs@newscj.com

붓다의 출생과 불교의 탄생

불교는 기원전 6세기경 고타마 붓다(Gautama Buddha, BC 563~483년)에 의해 창시됐으며, 히말라야 산맥 밑자락, 지금의 네팔과 인도 북부지방 마가다 왕국을 중심으로 발흥했다.

붓다의 출생지는 룸비니였고, 성장지는 카필라성(Kapilavastu)이다. 부친은 사키아족 출신인 카필라 성주 슈도다나 왕이며, 모친은 왕비 마야 부인이다. 성은 고타마, 이름은 ‘싯다르타’라 하였으나 깨달음을 얻은 후 고타마 붓다라 불렀다. 또 사키아족의 성자라는 데서 석가모니 혹은 석존이라고도 불렀다.  

   
▲ 불진신 지골사리.

어머니 마야 부인은 싯다르타를 낳은 지 7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슈도다나 왕은 어린 싯다르타가 앞으로 위대한 왕이 되기를 바라며 일찍 학문을 가르치고 지극 정성을 다해 보살폈다.

싯다르타는 화려한 궁궐에서 생활했지만 거기에서 궁극적인 만족을 얻지 못하고 인생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많았다. 29세가 되던 어느 날 싯다르타는 궁궐 밖 세상을 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아버지의 승낙을 받고 궁궐을 나섰다. 

싯다르타가 마차를 타고 궁궐을 나가 밖에서 처음 본 광경은 늙은 노인이었다.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두 번째로 나가서는 병든 사람. 다음은 죽은 시체, 그 다음에는 인생의 문제에 대해 답을 찾고자 길을 떠난 어느 탁발승을 보게 된다.

4가지 장면을 목격한 싯다르타는 인생의 중대사인 생노병사에 대해 큰 의문을 품게 되고 이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된다.   

결국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출가(出家)를 결심한다. 그는 29세에 부인인 야수다라와 아들 라후라를 버리고 출가해 선정(禪定)과 고행(苦行)이라는 수행의 길을 택한다.

그는 알라라 칼라마와 우다카 라마푸타에게 사사받다가 만족치 못하여 스승을 떠나 5명의 수행자와 함께 다시 고행의 길을 떠났다. 6년의 고행 끝에 부다가야(Buddhagaya)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이 깨달음의 내용이 4체(四諦)·12연기(緣起)이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8정도(八正道)이다.

붓다는 깨달음을 법(法 Dharma)이라 하고 이 법을 다섯 수행자에게 최초로 설법(說法) 한 후 그들을 제자로 삼는다.

이로써 불교는 비로소 하나의 종교로서 교조(敎祖)·교리(敎理)·교단(敎團)을 갖추고 전파되기 시작했다.
45년간 교화(敎化) 활동에 힘쓴 붓다는 80세가 되어 입멸해 열반(涅槃)에 들고 종단은 제자 마하가섭 등이 중심이 돼 붓다의 율(律)과 법(法)을 유지하게 된다.

이후 붓다의 교법(敎法)은 정리되고, 여러 도시와 일반 서민들에게 전파되어 갔다. BC 317년경 찬드라 굽타(Chandra Gupta)에 의해 인도 최초의 통일국가인 마우리아 왕조가 성립되고 이 왕조 제3대 왕 아쇼카가 즉위한 후 불교는 비약적인 팽창을 하게 된다.

 

불교 교파 분열과 성장

불교의 급속한 팽창은 일면 교단 자체의 질서면에서 많은 문제가 제기되고 결국 교파분열을 초래했다.
붓다 사후 100년경 계율 해석을 놓고 전통적 보수파와 진보적 자유파가 대립되고 두 개의 부파(部派)로 나눠진다.

전자를 상좌부(上座部)라 하였고, 후자를 대중부(大衆部)라 한다. 분열은 붓다의 교설을 받아들이는 자세와 교단질서 확립에 대한 의견 차이가 주원인이 됐다. 크게 둘로 갈라진 부파는 계속 분열돼 각각 18∼20개 정도의 부파를 형성한다.

부파 발생의 발단은 계율 해석의 학설상 차이에 있었지만, 학설보다는 지도적 장로를 중심으로 한 체제가 달랐거나 지리적으로 너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부파를 형성하는 일도 생겼다.

이 시기를 부파불교 시대라고 지칭하는데 이와 같은 불교의 부파적 전개는 외적 확대와는 달리 붓다 당시와 같은 순수성을 잃고 율(律)·경(經)에 대한 훈고학적인 주석학(注釋學)에 빠졌다. 곧 아비달마 불교의 발달을 보게 되었으니 불교는 승원(僧院) 중심, 출가(出家) 중심의 학문불교로 변화하고, 따라서 대중성을 잃어버린다.

이에 불교계 일부에서 불교 본래의 모습으로 복귀하려는 운동이 일어났고 그러한 운동은 진보적 입장을 대표하던 대중부 및 재가(在家) 불교도가 중심이 된다. 이것을 대승불교운동이라고 한다.

 

대승불교와 소승불교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간다라를 거쳐 티베트,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타클라마칸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이들 지역은 중국에서 서역이라 불리던 곳으로 대월씨(大月氏)·안식(安息)·강거(康居) 등의 이 지역 승려들에 의해 불경과 불상이 전래되고 경전이 한역되었다. 중국에 전해진 불교는 중국 전래의 도교 사상과 많은 융합이 일어났다.

대한민국과 일본에 전래된 불교는 중국의 한역 불경이 근간을 이루었으나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 역시 지속적으로 전파되었다.

티베트에 전래된 불교는 독자적인 발전을 거쳐 라마교라 불리게 되었으며 몽고에 전파되었고 원나라 시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원나라 멸망 후 중국과 한국 등에서는 쇠퇴하였으나 이후 청나라 시기에 황궁의 종교가 되기도 하였다. 서쪽으로 전파된 불교는 유럽에까지 전파되어 칼미크 공화국은 불교를 국교로 삼기도 한다. 북방 경로를 거쳐 전파된 불교는 대승불교라 불리기도 한다.

또한, 동남아시아 지역에도 불교가 전파되었으며 스리랑카, 타이, 캄보디아, 버마, 베트남 지역의 대다수 사람들이 불교를 믿는다. 동남아시아 지역에는 산스크리트어의 방언인 팔리어로 된 불경이 전파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남방 경로를 통해 전해진 불교를 소승불교라고 부르고, 일본에서는 상좌부불교라고 부른다. 또한 남방불교 또는 테라바다(Theravada) 불교라고도 부른다.

 

   
▲ 국보 24호 석굴암 불상.

한국불교 전래와 발전

한국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 6월 전진의 왕 부견이 순도스님을 통해 불상과 경전을 받으면서 부터다. 고구려에서는 이때 성문사를 지어 순도를 머물게 했으며 다시 2년 뒤에 아도스님이 오자 이불난사를 지어 머물게 했다.

백제에는 침류왕 원년(384년) 호승 마라난타가 동진으로부터 배를 타고 건너왔다. 신라의 경우는 고유신앙의 반발 등 약간의 난관을 거쳤으나 법흥왕 14년(527년)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왕실을 중심한 귀족들이 불교를 받아들이게 된다.

고구려·백제·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뒤 한국의 고대 불교는 찬란한 황금기를 구가한다. 전국 곳곳에 사찰이 세워지고 국왕으로부터 일반 민중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불교를 신앙했다.

특히 신라와 고려시대에서는 ‘이 땅이 곧 불국토’이기 때문에 호국이 호법이라는 불연국토사상이 깊게 뿌리내림으로써 불교는 국가의 보호아래 화려하게 발전할 수 있었다.

고려일대를 통해 왕실의 보호에 힘입어 발전하던 불교는 조선왕조의 출현과 함께 급속하게 몰락의 길을 걸었다.

불교는 조선시대 3대 태종의 즉위와 함께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태종은 11종파를 조계·천태·화엄·자은·중신·총남·시흥 7종으로 통폐합하고 각 종파의 소속사찰을 극히 제한했다. 사찰소유의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고 도첩제도를 엄격히 시행해 일반사람들이 승려가 되는 길을 봉쇄했다.

또 고려 이래의 제도이던 왕사·국사제도를 폐지함으로써 승려의 사회적 지위를 격하시켰다. 이 같은 척불정책은 세종 때에도 계속돼 조계·천태·총남종을 묶어 선종으로, 화엄·자은·중신·시흥종을 묶어 교종으로 다시 축소 조정했다.

척불정책은 조선후기까지 유지된다. 조선후기의 불교 상황은 승려의 사회적 신분저하로 도성출입마저 자유롭지 못한 형편이었다.

1895년 모든 척불정책이 중단되지만, 1910년 한국은 일본에 치욕적인 합병을 당한다. 한일합병 후 일본은 한국불교를 통제하기 위해 사찰령을 제정해 31본산제를 운영하고 한국불교를 왜색화하기 위해 승려의 대처화를 추진해 전통교단의 순수성을 파괴한다.

이에 불교계는 일제의 한반도 강점과 불교의 왜색화에 대항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3.1운동 때 불교계는 한용운과 백용성을 민족대표로 참여시켰으며 많은 고승들도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해방이후 한국불교는 또 다시 시련을 맞는다. 국토의 분단으로 이북지역에서는 종교활동이 중단됐고 6.25동란으로 많은 사찰과 문화재가 손상을 입었다.

1954년 불교계는 일본이 남기고 간 왜색승풍을 청산하기 위해 정화운동을 시작했으나 기득권과의 마찰로 교단들이 분열되고 만다.

현재 문화체육관광부 종무과(제출자료 근거)에 등록된 한국불교 종단은 최대종단인 조계종을 포함 103개 종단(미파악 65개)으로 분열돼 있다.

또한 그 역사가 오래된 만큼 불교는 우리나라의 최대 종단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 책임 또한 크다.

최대 종단이기에 불교계 또한 종교 본연의 역할에 충실할 때 사회에 희망이 되고, 이웃종교 간 상생의 길을 걷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 불교탱화(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족자나 액자의 형태로 만들어서 거는 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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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7월 14일 (화) 21:12:21 뉴스천지 newscj@newscj.com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천손(天孫) 즉, 하늘의 자손으로 불렸다. 하늘을 향한 간절한 바람과 그리움이 어찌나 컸으면 한 나라의 국가(國歌)에도 ‘하느님(하나님)이 보우하사’라는 말이 나오겠는가. 또한 한민족의 시조로 받드는 고조선의 첫 임금인 단군왕검은 천제(天帝)인 환인의 손자이며, 환웅의 아들로 나타난다.

동방예의지국 즉, 군자국(君子國)으로도 불리는 대한민국. 하늘의 큰 복을 받은 민족이기에 예로부터 외세의 숱한 침략과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백의민족. 외세의 압력과 계략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왜곡했던 그 설움을 극복하는 길은 우리 민족의 역사를 다시 바로잡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첫 번째 걸음으로 ‘원구단(圓丘壇)’에 대한 의미를 되짚어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 원구단. ⓒ뉴스천지


원구단(圓丘壇)이란

1967년 7월 15일 사적 제157호로 지정된 원구단은 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제천단(祭天壇)을 말하며, 일명 원구단(圓丘壇) 또는 줄여서 원단(窩壇)이라고도 한다.

이 명칭은 지신(地神)에 제사 드리는 사직단(社稷壇)이 음양론(陰陽論)에 따라 방형으로 쌓는 것과는 달리, 원이상천(圓以象天)이란 관념에 따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단을 둥글게 쌓은 것과 관계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풍습은 농경문화의 형성과 더불어 시작됐으며, 삼국시대부터는 국가적인 제천의례(祭天儀禮)로 시행됐다.

하늘의 자손인 우리 민족이 오랜 상고시대부터 매년 10월 상순에 국중대회를 열어 둥근 단을 쌓고, 단군께서 친히 하늘에 제사를 올려 국태민안을 기원해 왔는데, 이 제천단이 바로 ‘원구단’이다. 그리고 이 ‘원구단’ 천제는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등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삼국사기’에 인용된 ‘고기(古記)’에 의하면 ‘고구려·백제가 다같이 하늘과 산천에 제사지내다’ ‘단(壇)을 설치하고 천지에 제사지낸다’라는 내용으로 미루어, 이때부터 이미 제천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 성종 2년(983년) 정월조에 나타난 ‘왕이 원구(圓丘)에서 기곡제(祈穀祭)를 올리고, 몸소 적전(籍田)을 경작하였다’는 고려의 원구제는 5방의 방위천신(方位天神)과 전체 위에 군림한다는 황천상제(皇天上帝)에게 제사를 드렸다.

 
 
▲ 원구단. ⓒ뉴스천지


원구단의 수난

고려 말 우왕(禑王) 11년(1385년) 고려의 국가적인 의례는 제후의 의례에 따라야 한다는 주장에 의해 당시 친명정책(親明政策)을 펴나가던 중이어서 부득이 제천의례는 폐지되고 말았다.

조선 초 제천의례는 제후국으로서는 행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명분론과, 이와 달리 농업국가로서 전통적 기우제(祈雨祭)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의견이 갈려 설치와 폐지를 거듭하게 됐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태조 3년(1394년)에 제후국의 예에 준하여 조선의 동방신인 청제(靑帝)에 제를 올리기 위한 원단이 설치되었고, 세종 원년(1419년)에 실시된 원구제(園丘祭)도 오랫동안 계속되던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시행했다.

조선 초부터 억제된 제천의례는 세조 2년(1456년) 일시적으로 제도화되어, ‘상정고금례(詳定古今禮)’에 실려 있는 고려의 원구단(圓丘壇)을 참작하여 1457년 원구단을 신설하여 제를 드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원구제도 세조 10년(1464년)에 실시된 것을 마지막으로 중단됐다.

원구단이 다시 설치된 것은 고종 34년(1897년) 조선이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여 제천의식을 봉행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이다.

이 해에 의정(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천신(天神)에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상소에 의해, 규모와 체제는 역대의 예전(禮典)을 기초로 해 영선사(營繕使) 이근명(李根命) 등을 시켜 길지인 남교(南郊) 회현방 바로 지금의 소공동으로 건립지를 선정한 후 단(壇)을 건립했다.

광무(光武) 원년(1897년) 10월 고종 황제의 즉위를 앞두고 남별궁(南別宮) 터에 원구단을 쌓았고, 10월 11일 고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친히 원구단에 나아가 천신에 고제(告祭)한 후 황제에 즉위했다.

이때에 건립된 원구단의 체제를 보면 황천상제위(皇天上帝位)는 단의 제1층 북쪽 동편에서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황지지위(皇地祗位)는 단의 제1층 북쪽 서편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있고, 대명천(大明天)과 야명성위(夜明星位)는 각각 제2층의 동·서쪽에 있으며, 제3층 동쪽에는 북두칠성(北斗七星)·오성(五星)·이십팔수(二十八宿)·오악(五岳)·사해(四海)·명산(名山)·성황(城隍)의 자리를 두고, 서쪽에는 운사(雲師)·우사(雨師)·풍백(風伯)·뇌사(雷師)·오진(五鎭)·사독(四瀆)·대천(大川)·사토(司土)의 자리를 두었다.

1911년 2월부터 원구단의 건물과 터는 조선총독부가 관리하였는데, 만행을 부려 1913년 원구단을 헐고 그 자리에 철도호텔(현재의 조선호텔)을 지었다.

현재 이곳에는 황궁우(皇穹宇)와 돌로 만든 북인 석고(石鼓) 3개가 남아있다. 팔각당 건물은 광무 3년(1899년)에 축조된 것으로 화강암 기단 위에 세워진 3층의 팔각 건물이며, 이곳 중앙에는 태조 이성계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고, 익공계 건물로 청의 영향을 많이 받아 복잡한 장식이 있다. 또한 석고는 제천(祭天)을 위한 악기를 상징하는 모습으로 몸체에는 화려하게 조각된 용(龍) 무늬가 있다.

 


천제제천권 회복 외치는 박영록 총재
“우리 민족은 천손(天孫)이자 인류의 장자”

대다수의 사람들은 ‘원구단’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원구단과 천제제천권 회복이 갖는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지 못한다. 그저 한 호텔 안에 있는 작은 정원쯤으로 생각하고 무심히 넘길 수도 있는 이 ‘원구단’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있다.

바로 박영록(전 신민당 부총재) 범민족화합통일운동본부 총재가 그 주인공으로 초선의원이던 1970년 독일 베를린 스타디움에 새겨진 손기정 선수의 일본 국적을 끌과 정으로 한국으로 바꿔 화제를 모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 박 총재가 지금은 ‘원구단 회복’과 ‘천제제천권 회복’을 위해 만방으로 뛰고 있다.

박 총재는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천지조화에 의해서 탄생했기에 피조물이면서도 부모에게 물려받은 천성이 있다”며 “그렇기에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알게 되고, 부모가 바라는 바를 이뤄드려 즐겁게 해드려야겠다”는 의식이 있다고 설명했다.

덧붙여 세상만물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 우리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근본인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은혜에 보답하는 것은 천손이자 인류의 장자인 우리 민족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인간이 하늘과 땅에 보답하고, 바라는 바를 지구상에 이루겠다는 것이 ‘천제(天祭)’로 나타난 것입니다. ‘천원지방’이라 하여 하늘을 위해 둥근 단을 쌓고 제사를 지내고, 하늘의 뜻을 받아서 ‘천리(天理)’가 통하는 하늘과 같은 세상을 현 세상에 만들자, 그것이 바로 원구단에서 천제를 지내면서 바랐던 뜻입니다.”

박 총재는 “우리 민족은 백의민족 곧, 백의천사로서 ‘인류가 하나 되어 세계평화를 도모하고, 이 땅 위의 천국을 이루자’라는 의미로 천제를 드려온 천손(天孫)”이라며 “하얀 옷을 입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하늘의 뜻을 지구상에 전하다 보니 그동안 숱하게 외세의 핍박을 받아왔다”고 전했다.

사대주의사상과 일본의 천황사상으로 인해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었던 천손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그 의무를 저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박 총재는 “우리 민족은 유일하게 이 세상에 천국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며 “이러한 믿음과 생각이 종교와 서양문물에 의해 거의 빈사상태에 빠진 수준”이라고 애통해 했다.

그러면서 “우리 민족은 천손이다. 장자다. 하나님을 향해 하늘에 기도를 하고 소원을 빈다. 그러면 그 소원을 들어주신다. 이것이 소통이다. 하늘과 통하는 민족이다”고 강조했다.

또 “이 땅에 극락, 천국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그런 것을 이룰 수 있고 우리는 이룰 수 있는 그 길을 따라가야 한다”며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아도 천지조화시대가 있었을 것이다. 인간이 어렸을 때는 부모를 못 알아봤지만 인류역사상 우리가 제일 먼저 하늘과 땅이 부모라는 것을 알았다”며 이 시대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원구단 회복과 천제권 회복은 중요한 일이라고 피력했다.

그는 “우리 민족은 ‘광명이세(光明理世)’ 즉, 밝은 빛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민족이며,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정신을 가진 민족이다”면서 일본에게 빼앗긴 ‘천제권’을 하루속히 찾아와야 한다고 호소했다.

마지막으로 박 총재는 “우주의 위치가 달라져 천지가 달라지고 세상이 잘못된 것”이라며 “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안에 있는 안테나를 하늘에 맞춰 하늘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덧붙여 하루속히 원구단 제천권을 회복해 하늘의 자손으로서 장자민족으로서의 면모를 갖출 것을 당부했다.

 

광명이세, 동방의 등불

우리 민족은 유달리 근본과 족보를 중요하게 여긴다. 각 개인의 족보와 근본을 중시 여기는 만큼 우리 민족의 근본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 할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의 국조는 단군이다. 외세에 의해 ‘신화’로 전락하기도 했지만 단군왕검의 존재는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 단군은 어떠한 존재인가. 강화도 마니산과 태백산에는 단군이 쌓은 제단이 있다. 그 유적들 중에서도 강화도 마니산 제단은, 영, 혼, 육 3일체 인간의 상징을 반영한 제단으로 단군이 ‘사람 안에서 하늘의 영과 땅의 혼이 하나 됨(3일체 인간사상)’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군은 그가 쌓은 제단에서 천제를 드린 제사장이자 인간을 치리하는 왕이었다. 이러한 단군이 제사를 드리며, 섬긴 신은 과연 누구인가. 그에 대한 답은 단군이 남긴 삼일신고(三一神誥)에 있다. 삼일신고란 문자 그대로 삼위일체 신을 고한다는 뜻이다. 즉, 단군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하여, 증거한다는 뜻이다. 이는 우리 민족이 하늘의 자손이요,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장자 민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구절이다.

뿐만 아니다. 밖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세계인들은 우리나라를 향해 ‘동방의 등불’ ‘동방예의지국(군자국)’이라고 칭한다. 인도의 타고르가 우리를 향해 ‘동방의 등불’이라 불렀던 것은 ‘광명이세’ 즉, 하늘에다 제사를 지내고 빛으로 천하를 다스리니 그 권능이 동방의 등불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에 ‘홍익인간’과 ‘경천애인’ 사상이 민족의 근본사상임을 안다면 이제라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제권의 회복과 원구단의 회복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천손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때에 그 옛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이 땅에 천국이 이루어지길 소망’하는 그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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