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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4월 02일 (토) 16:05:43 백하나 기자 101@newscj.com

 

   
지난 29일 찾은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모전리 매몰지 뒷편 상추재배 농가 비닐하우스에서 나오는 물에 역한 냄새가 난다는 제보가 입수돼 본지 기자가 사실 확인을 위해 물을 담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정부 진실 감추나 지하수 오염 사태‘의문투성이’
사체 이전 후에도 피해 여전… 애꿎은 주민만 속앓이

[천지일보=백하나 기자] “직접 보세요. 냄새가 나는지 안 나는지.”
문제의 구제역 매몰지로부터 불과 5m 건너에 있는 비닐하우스에서 상추를 재배하는 농장주 이종훈(30) 씨는 그간의 시달림으로 무척이나 답답했던지 보란 듯이 지하수 펌프를 콸콸 틀어 보였다. 기자가 지하수 펌프로 가까이 갔을 때는 벌써 비릿한 악취가 코끝으로 전해져 손으로 코를 막아선 뒤였다.

“내 눈으로 동물성 기름이 둥둥 뜨는 것도 봤고 물이 뿌예지더니 거품이 생기는 것도 봤어요. 그런데 정부는 구제역 침출수로 인한 오염이 아니라고 하니 답답합니다.”

이 씨는 정부에서 지난 1월 18일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모전리 일대에 9016마리의 돼지를 묻고 열흘도 채 안 돼 지하수에서 냄새가 나고 기름이 뜨는 등의 오염 피해를 겪었다고 전했다.

이 씨는“현재 하우스 주변에 설치된 4개 펌프 중 냄새가 안 나는 1개만 사용하고 있다”며“오는 여름에는 물을 더 많이 써야 하는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며 가슴을 쳤다.

기자가 방문한 지난달 29일은 벌써 문제가 된 매몰지를 영농조합 축산단지 내 축분처리장으로 옮긴 뒤였다. 하지만 매몰지를 이전한 이후에도 정부는“구제역 침출수로 인한 지하수 오염은 아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빈축을 사고 있다.  

   
▲ 지하수가 오염됐다는 보도가 이어 진후 이천시는 매몰지를 급히 인근 축산처리장으로 옮겼다. 이전 매몰지에서는 남은 침출수를 빼내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한편 비닐하우스 재배농가는 오염된 지하수 물을 빼내기 위해 수시로 하천에 물을 방류했다. 농가가 흘린 물은 배수로를 타고 매몰지 주변으로 또 다시 흘러 들어가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피해는 있는데 원인 없는 상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정부는“침출수인지 동물폐사로 인한 것인지 정확히 확인되지 않았다”며“침출수로 인한 오염은 없다. 더 검사해보겠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로 인해 일각에서는 정부가 침출수로 인한 오염 사실을 은폐· 축소하려는 것은 아니냐는 우려마저 제기되고 있다.

매몰한 모전리 일대 한 주민은“침출수 문제가 있기 전에 벌서 수질검사를 두 번이나 했다. 오염이 없다고 말해오던 정부가 3월에 여론이 불거지니까 매몰지를 황급히 옮기는 모습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다”고 전했다.

지난달 27일 현역 국회의원이 입수한 자료가 세상에 공개되면서 이러한 의혹은 더욱 증폭되는 양상이다.

창조한국당 유원일 의원은 환경부가 지난 2월 한국원자력연구원이 백사면 모전리 매몰지 주변을 대상으로 실시한 지하수 정밀검사 결과를 입수해 발표했다.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모전리 인근 하우스 1에서는 3.817mg/L, 하우스 2에서는 1.120mg/L, 하우스 3에서는 0.250mg/L, 가정집 1에서는 0.597mg/L 분량의 가축사체유래물질이 측정됐다.

특히 이 수치는 매몰지와 가까울수록 많은 양이 검출됐는데 연구원은 이를 미뤄 침출수로 인한 오염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사태가 확산되자 지난달 29일 환경부는 긴급브리핑을 갖고 유 의원이 밝힌 자료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환경부 관계자는 “한국원자력연구원이 사용한 측정 방식은 ‘간이검증법’”이라며 “이 방법으로는 지하수 오염 원인이 침출수인지, 축산 폐수인지 구분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원자력연구원은 “환경부의 기존 관리 지침으로는 오염원은 침출수 여부를 판별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어 원자력연구원은 “(우리는) 침출수 여부를 단기간에 확인할 수 있도록 가축사체유래물질과 총 유기탄소 기준 등을 근거해 검사했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현재 정부는 암모니아성질소, 질산성질소, 염소이온, 대장균군 등 4가지 방법만으로 오염 여부를 측정하고 있다. 이에 반해 원자력연구원은 13가지 항목을 측정한다.

하지만 이제 와서 자신들이 검사를 의뢰한 업체의 측정방식을 문제 삼는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환경공학과 교수는“아무리 원자력연구원이 구제역 침출수 측정 신기술을 개발했다고 하더라도 환경부가 왜 원자력 공학을 연구하는 기관에 검사를 의뢰했는지 이해가 안 간다”며“이를 알고도 검사를 맡겼다면 측정 방식도 내부에서 알고 있었다는 것인데 침출수 유출 가능성을 제시한 결과를 믿지 못하는 건 더욱 의문”이라고 전했다.

다른 환경공학 전문가도“이전까지 냄새가 나지 않던 마을 지하수에 매몰 후부터 냄새가 났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구제역 침출수 때문으로 볼 수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원자력연구원의 발표를 미리 알고도 발표하지 않은 것도 궁금증을 자아내는 부분 중 하나다.

환경부가 의뢰를 맡겨 검사 결과를 받은 시점은 지난 2월 26일. 유 의원이 사실을 공개한 지난달 27일로부터 무려 1달여나 차이가 났다.

이와 같은 논란은 기존 정부의 지하수 측정 방식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있어 보다 분명한 점검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유 의원은“매몰 지침에 따른 양호한 매몰지에서 침출수로 인한 지하수 오염이 밝혀진 이상 정부의 검사 결과를 믿을 수 없다”며“가축사체유래물질분석 등과 같이 보다 정밀한 방식으로 전체 매몰지를 검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전국 12개 시도 81개 시·군·구에서 가축 매몰. 살처분 농가수 6250곳. 매몰 가축 347만 9513마리. 구제역 방역과 매몰 보상에 든 비용 3조 원. 역사상 최악의 구제역 사태로 오명을 남긴 2010년 안동발(發) 구제역이 지난 120여 일간 남긴 기록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지난달 구제역 위기경보 단계를 ‘심각’에서 ‘경계’로 하향 조정하고 구제역으로 인해 긴급 설치된 정부기구인 중앙안전대책본부(중대본)를 해산할 뜻을 전했다. 중대본은 “구제역 매몰지 정비보완 공사가 차질없이 완료돼 활동을 마무리 한다”고 지난달 31일 밝혀 사실상 구제역은 종식 선언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구제역 매몰로 인한 2차 환경오염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구제역 재앙은 이제부터라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지난달 27일은 경기도 이천에서 구제역 침출수로 인한 지하수 오염이 처음으로 공식 확인된 데 이어 환경부가 매몰지 주변 관정 3000여 곳의 오염도를 조사한 결과 무려 143곳에서 오염이 확인됐다.

무리하게 살처분을 진행하고, 하천과 밭 등 매몰이 금지된 곳에 매립을 해 놓은 상황. 환경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토양·수질 등의 환경 피해는 물론 각종 질병, 식수원·먹을거리 오염 등의 피해가 직접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란 관측을 내놓고 있다.

천지일보는 이달부터 <구제역 매몰 그 후>라는 특별 기획을 통해 매몰 이후의 상황을 점검·진단하고 보완의 필요성을 알리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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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역사재단은 사이버외교사절단 반크와 함께 개설한 온라인 강좌 ‘글로벌 역사외교 아카데미’ 오픈 시연회를 8일 국회 도서관 소회의실에서 개최했다.

글로벌 역사외교 아카데미는 동해 표기와 독도 영유권을 비롯해 동북공정 등 동북아의 역사 현안 문제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이해를 제고하기 위해 개설됐다.

동북아역사재단과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는 아카데미를 통해 전세계 한글학교와 우리나라 청년들에게 동북아의 역사 현안을 올바르게 교육시키고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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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 비움]세계인이 함께 나눈 한식의 맛 과 정(情)

사회기획 2010/04/29 23:22 Posted by 뉴스(news) 뉴스천지
http://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42289

2010년 04월 25일 (일) 11:09:14 송태복 기자 xoqhr71@newscj.com
   
▲ 인도네시아 대사관에서 각국 대사일행에게 다채롭고 독특한 한식을 선보인 한국음식자원봉사단 ⓒ천지일보(뉴스천지)

한국음식자원봉사단
인도네시아 대사관에 퍼진 한식예찬

지난 11일 저녁 인도네시아 대사관저에서 탄성이 쏟아졌다. 탄성을 불러일으킨 주인공은 기품있는 맛을 선보인 한식이었다. 헝가리, 러시아, 독일, 일본을 비롯해 라오스, 말레이시아 등 10여 개국 대사 일행 50여 명이 한식의 새로운 변화를 눈과 코와 입으로 즐기는 행운을 누렸다.

니콜라스 딴디 담멘( Nicholas T. Dammen) 주한 인도네시아 대사는 인사말을 통해 “한국에서 일하는 가장 큰 즐거움이 바로 한식을 자주 먹는 것”이라며 “대사관보다 주변 한식당을 더 자주 찾는다”고 했다. 또한 “오늘 한식을 맛본 모든 사람이 자신과 같은 한식전도사가 될 것”이라며 한식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표현했다. 담멘 대사는 한국어로 인사말을 준비하고, 한국 노래까지 준비해 이날 행사를 더욱 빛냈다.

전문 한식요리사로 구성된 한국음식자원봉사단(이하 한식봉사단, 단장 최영창)이 각국 대사 일행에게 내놓은 한식은 색달랐다. 동양의 맛과 서양의 멋이 어우러진 느낌이었다. 이번 한국음식의 밤은 2년 전 최 단장이 라오스 대사관에서 한식봉사를 한 것이 계기가 돼, 말레이시아 대사관에 이어 3번째로 인도네시아 대사관의 요청으로 이뤄졌다. 봉사에는 총 25명의 요리사가 참여했으며, 각자 음식과 업무를 분담했다.

주로 소외층을 대상으로 매월 한두 차례씩 요리봉사를 해온 한식봉사단이지만, 그들이 동남아 대사관 요리봉사에 기꺼이 나선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최 단장은 “동남아 빈민지역 요리봉사에서 느꼈던 그곳 주민들의 순박함을 생각하며, 그들에게 다시 따뜻한 한식을 먹이고픈 마음이 함께 담겨 있다”고 했다.

또한 “평소 많은 외국인이 한식은 비빔밥, 갈비, 김치, 불고기 정도로만 알고 있는 현실에 답답함을 느껴 다양하고 몸에도 좋은 우리 음식을 세계 속에 알리기 위해 한식홍보대사를 자청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2년 전 처음으로 대사관 한식봉사를 요청했던 시본 캐올라 주한 라오스 대사부인은 “당시 한식봉사단의 요리를 맛본 참석자들이 뛰어난 한식의 맛과 독창성에 감탄했다”며 “자신은 김치찌개, 된장찌개 등 한국요리를 즐겨 먹는 한식애호가가 되었다고 말했다.

림란 린 이브라힘 주한 말레이시아 대사는 “지난해 말레이시아 대사관에서 경험한 한식은 정말 훌륭했다”며 “그런 기회가 또 주어지길 희망한다”고 전했다.

이날 한식봉사단은 수차례 논의를 거쳐 선정한 총 12가지 코스요리를 선보였다. 해독 효과가 있는 녹두죽을 시작으로 쌀가루를 묻힌 구운 새우, 각종 채소를 넣어 만든 월과채와 어만두, 전복 등 해산물 요리, 떡갈비와 갈비와 각종 봄나물 등 한국적이면서도 세련된 맛과 멋을 갖춰 참석한 이들의 찬사를 받았다.

각 테이블에는 전통주인 막걸리, 복분자주, 인삼주도 제공됐다. 참석자 대부분은 막걸리를 알고 있는 듯했으나, 막걸리와 소주의 차이를 묻는 경우가 많았다. 직접 담근 인삼주는 쓴맛이 강해 대부분이 맛을 보는 정도에 그쳤다.

최 단장은 “이번을 마지막으로 동남아 대사관 요리봉사를 끝내고, 다음 기회에는 아프리카 대사관에서 요리봉사를 펼칠 예정”이라고 했다. 그는 “아프리카 어린이에게 따뜻한 밥을 먹이고픈 마음으로 아프리카 대사관 요리봉사를 계획했다”고 말했다.

   
▲ 니콜라스 딴디 담멘 주한 인도네시아 대사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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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충무공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사회기획 2010/04/29 23:18 Posted by 뉴스(news) 뉴스천지
기회기사 보기: http://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42480

 
우리가 충무공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2010년 04월 27일 (화) 21:29:56 뉴스천지 newscj@newscj.com
   
▲ 이순신 장군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死卽生 生卽死)” … 나라 생각하는 마음 깊었던 충무공

[뉴스천지=서영은, 김현진 기자]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결코 적에게 알리지 마라! 군사들을 놀래게 해서는 안 된다.”

임진왜란 당시 노량해전에서 적의 총탄을 맞아 죽음을 맞이한 순간에도 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지키고자 했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마지막 음성이다.

백성으로서, 군사로서 충무공의 나라를 향한 충성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이 같은 사실은 이 충무공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날인 1592년 5월 1일부터 전사한 1598년 10월 7일까지 생전에 기록했던 <난중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死卽生 生卽死).” “나라에 충성을 바치려했건만 이미 죄에 이르렀고, 어버이에게 효도하려 했건마는 돌아가셨다.” 등 충무공의 어록을 보면 나라와 부모를 염려하고 생각하는 마음이 깊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난중일기>는 이 충무공의 개인적인 정신세계나 사상은 물론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에 대한 사실적 기록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일기의 진실성과 함께 예술적으로도 매우 뛰어난 평가를 받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친필 등 여러 가지 요건으로 <난중일기>는 국보 76호로 지정됐으며, 현재 충남 아산 현충사에 친필초고본이 보관돼 있다.

◆충무공 동상 광화문광장에 서다

서울 광화문광장에 우뚝 서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像)은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1968년 4월 27일 건립됐다.

세종로 사거리, 광화문광장에 충무공 동상이 세워지기까지는 여러 에피소드가 섞여 있다. 에피소드라기보다는 암울했던 역사적 사실이 이순신 장군 동상을 충무로가 아닌 광화문광장에 우뚝 서게 만들었다.

1968년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일본이 철거했던 광화문을 한양 궁궐의 위상을 찾아보자는 의미로 복원 공사를 시작했지만 결과적으로 엉뚱한 장소로 복원하고 말았다. 원래의 한양 땅 상징 축선에 맞게 북한산과 관악산을 잇는 축선에 복원돼야 북한산-경복궁 근정전-광화문-숭례문-관악산이 일직선상에 놓이게 되는데 복원된 광화문은 제자리에서 한참 벗어난 위치인 메이지왕을 모셨던 일본인의 신궁 터를 향해 복원된 것이다.

이에 박 전 대통령은 일본의 기(氣)를 누를 수 있는 방도로 이순신 장군 동상 건립을 지시하게 됐다. 당시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에서는 세종로에 ‘세종대왕 동상’을 세우자고 했지만 박 전 대통령은 “백전백승으로 일본을 격퇴한 이순신 장군을 일본이 가장 무서워할 것”이라며 최종적으로 이순신 장군 동상을 세울 것을 지시했다.

동상은 형상의 완전한 사실보다는 그 인물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강조해 조각됐는데 당시 역사를 후대에 전승시켜야 한다는 고 김세중 작가의 희망으로 새로운 충무공의 모습이 탄생되게 됐다. 이러한 상징적 표현 자세를 택하게 된 배경은 국가중심으로 통하는 길목에 놓일 호국성 웅상이라는 위치와 인물의 특성이 지니는 맥락 때문이다.

동상을 관리하는 한 관계자는 “충무공이 지키고 있으니 무서울 게 없다. 어느 나라도 우리나라를 우습게보지 못할 것”이라며 “외국 관람객들이 이순신 장군의 눈을 보고 카리스마를 느끼고 돌아간다. 그건 한국 역사를 인식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처음 이순신 장군 동상의 높이는 5m로 계획됐으나, 세종로 폭이 100m로 확장되면서 동상의 높이도 1.5m 높아진 6.5m로 변경됐다는 비화가 공개되기도 했다.

◆충무로엔 충무공이 없다

1545년 4월 28일 서울에서 태어난 이순신 장군. 조국을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충무공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46년 10월 1일, 그가 태어난 곳에는 그의 시호를 딴 이름이 붙었다. 1960~70년대 충무로는 문화․예술 영화인의 거리로 유명해지기 시작해 아직까지도 충무로엔 문화 예술인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충무로를 지나던 대학생 강민지(22) 양은 “충무로가 충무공과 관련이 있다는 건 학교에서 배워서 아는데 자세히는 모른다. 예전부터 영화의 거리, 예술의 거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만 알고 있다”고 말했다.

직장인 박철균(32) 씨는 “충무로 하면 영화 생각이 먼저 나지 이순신 장군이 떠오르진 않는다”며 “영화인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리기 때문에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충무로가 문화예술인들의 거리로 인식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와 같은 현상에 서울역사박물관 김문택 박사는 “충무로에 역사적인 이미지를 전달하고자 한다면 이순신 장군을 상징하는 기념물이나 조각, 더 나아가 기념관이라도 하나 있어야 사람들의 인식이 다양화 될 것 같다”면서 “서울의 역사에 대한 시민들의 이해도가 낮은 것도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오는 28일 충무공 탄신일을 맞아 서울 광화문광장에 이순신 장군의 생애와 업적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충무공 이야기’ 전시공간이 마련된다.

안승일 서울시 문화국장은 “광화문 광장에 이순신 장군 동상만 있고, 정작 장군의 애국충정 등을 전달할 스토리텔링이 없다는 지적에 따라 기념관을 추진하게 됐다”며 “충무공 이야기는 세종 이야기와 함께 광화문광장을 역사 현장으로 되살려 ‘시민을 위한 살아있는 공간’으로 재탄생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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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 비움] “늘그막에 찾아주는 이 있어야 희망”
‘걸레와 찬밥’ 독거노인 온라인 공동체
2010년 02월 05일 (금) 18:48:22 박미혜 기자 mee@newscj.com

심부름 달인 9년째
10원도 허투루 안 써

   
▲ '걸레와 찬밥' 회원들과 함께
“어린이들은 그 자체가 희망입니다. 하지만 독거노인들한테는 절망밖에 없어요.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잖아요. 그분들의 마지막을 단 한순간이라도 웃을 수 있게, 편하게 해드리고 싶은거죠”

‘걸레와 찬밥(http://cafe.daum.net/imbop/, 이하 걸찬)’ 카페지기 임희구 시인은 독거노인들의 심부름꾼으로 살아온 지 올해로 9년째다.

걸찬은 온라인 카페 등에서 모인 돈으로 매월 3째주 토요일 7~8명의 회원들과 함께 서울 노원구 상계동 주변 독거노인들을 찾아다니며 심부름을 해오고 있는 것이다. 

9년 전 문인들의 회식자리에서 ‘의미 있는 곳에 돈을 써보자’고 제안했던 것이 한 푼 두 푼 모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걸찬’은 공중파 방송도 타고, 신문에도 여러 번 실리며 세간의 주목을 받아왔다. 유명해진 만큼 법인으로 만들어 좀 더 규모 있게 꾸려나가자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이래저래 모인 돈을 어르신 지원금이 아닌 운영비로 쓰는 게 싫어 만들지 않았다.

임희구 시인은 비닐봉지 값 20원도 마트직원과 실랑이를 벌여 무상으로 받아오는 사람이다. 기부금은 단돈 1원도 낭비 없이 전액 어르신들을 위해 써야 한다는 게 임 시인의 생각이다.

그는 “어려운 이웃에게 쓰라고 보낸 기부금이 단체장의 핸드폰 값, 회식 값으로 쓰이는 걸 봤다”며 “투명한 자금 운영을 위해 찾아뵌 할머니와 할아버지, 후원금과 사용내역 등 모두 걸찬카페에 공개해 놨다”고 말했다.

임 시인은 독거노인을 위한 봉사활동을 해오고 있지만 ‘봉사’라는 말을 아주 싫어한다. 뭔가 위에서 아래로, 가진 자가 그렇지 못한 자에게 베푼다는 어감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부름’ 간다고 말한다.

오랫동안 심부름을 해온 걸찬 회원들답게 그들은 전문 심부름꾼이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도 원하는 바를 찾아내 맞춰드리니 말이다.

좀 더 머물다 가길 원하면 머물고, 물품만 주고 가길 원하면 필요한 것만 드리고 간다. 냉장고를 열어보고 필요한 게 뭔지 찾는 게 처음 가서 하는 일인데 냉장고 열어보는 걸 싫어하는 어르신 냉장고는 두 번 다시 열지 않는다. 대신 필요한 것을 전화로 물어보고 챙겨간다.

   
▲ '걸레와 찬밥' 회원이 뜬 모자를 임희구 시인이 할머니께 씌워드리고 있는 모습
그렇게 때론 좋은 이웃, 편한 친구, 믿음직한 아들딸, 귀여운 손자손녀가 된다. 그래서 어르신들이 한 달이 지나면 어김없이 반겨주고 찾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심부름을 한다.

걸찬은 보통 ‘자식이 없는’ 어르신들의 심부름을 해오고 있지만 자식이 여럿 있어도 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어르신들도 돌본다.

대부분 지병을 가지고 여생을 외롭게, 힘들게 사는 어르신들을 위해 사소한 생필품에서 때론 병원비까지도 지원한다.

걸찬이 어르신들을 대할 때 특별히 조심하는 물건이 하나 있다. 바로 ‘카메라’다.

요즘 시대에 흔히들 즐겨 쓰는 카메라지만 독거노인들이 모여 사는 지역에선 목에 걸고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다. 그래서 카메라를 꺼내놓고 이동한다든지 사진을 마구 찍어대면 마을 사람들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또 심부름 한두 번 와서 사진만 연방 찍어대거나, 진실한 마음 없이 보이기에 급급한 행동을 하는 회원이 있으면 곧 임 시인의 경고 메시지를 받게 된다.

걸찬이 원하는 것은 순수한 심부름이다. 그래서 임 시인은 불우이웃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쌀 들고, 과자 들고, 사진 한 컷 찍는 정치인들의 생색내기 봉사활동은 정말 ‘잘못’ 되었다고 꼬집었다. 비단 정치인뿐 아니라 문학 활동의 소재를 찾기 위해 어르신들의 삶의 단면을 사용하는 것도 순수하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걸찬은 주로 연로하신 독거노인들과 인연을 맺으며 심부름을 해오다 보니 어르신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종종 접하게 된다. 하지만 그분들의 장례식장엔 가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남겨놓은 재산이 있어 오해를 받을 수 있고, 살아계실 때 잘하자는 의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임 시인은 독거노인을 위한 심부름을 지금처럼 ‘끝까지 쭈욱~ ’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누구의 강요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동참 속에서 지금까지 심부름이 지속돼 왔던 것처럼 말이다. 임 시인은 “늘그막에 그래도 반겨주고 찾아주는 이가 있다는 게 그분들에겐 희망”이라며 “걸찬 카페와 심부름은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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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23일 (수) 18:30:44 뉴스천지 newscj@newscj.com
   
▲ ⓒ천지일보(뉴스천지)
2009년 온갖 언론매체를 떠들썩하게 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투신 소식은 전 국민을 충격에 휩싸이게 만든 사건이었다.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금품을 받은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던 노 전 대통령은 지난 5월 23일 경남 김해 사저 뒤 봉화산 부엉이 바위에 올라갔다 끝내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갑작스런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한 국민들은 끊임 없는 추모행렬을 이루며 노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후 검찰은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리면서 금품수수 혐의에 대한 사건을 일단락지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폐렴으로 병원 치료를 받다가 고비를 넘기는가 싶더니 결국 지난 8월 18일 서거했다. 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국장 장례식이 23일 국회에서 치러졌다. 다소 엇갈린 평가도 있지만 ‘한국 민주화와 남북화해’에 기여한 그의 업적만큼은 이견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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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산은 종교문화의 산실이다”

사회기획 2009/09/09 11:05 Posted by 뉴스(news) 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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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의 매력에 빠진 데이비드 메이슨 교수 인터뷰
2009년 09월 07일 (월) 03:24:23 최성애 기자 tip@newscj.com

한국의 문화를 말하는 데 있어서 산을 빼놓을 수는 없다. 동양경전, 성경 등 각 종교의 경전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으며, 우리의 전통 샤머니즘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한국의 역사가 산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는 우리나라 전체 면적의 70% 이상이 산인 것과 우리나라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단군이야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도를 닦으러 산으로 간다는 말도 어색하지 않고, 불교의 사찰 등이 산에 있는 것은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만큼 산과 종교문화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며, 많은 종교문화가 펼쳐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게다가 우리네 국토에 자리한 산에 오르면 산신을 모셨다는 사당들과 탱화 등도 쉽게 접할 수가 있다. 이와 같은 우리네 독특한 종교문화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산의 유래와 신화, 역사에 대해서 남다르게 연구한 학자가 있으니 바로 데이비드 메이슨 교수이다.

그는 산신과 관련된 우리의 전통문화를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전국 방방곡곡의 산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수집한 사진자료와 연구한 자료를 책자로 발간하기도 했다. 아직 한국말이 서툰 이방인이지만 그의 열정은 한국인을 능가한다. 현재 한국을 외국에 소개하기 위한 영문 웹사이트를 운영 중이다.

   
▲ 메이슨 교수. ⓒ뉴스천지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중국의 문화와 종교에 관심이 많아 미시간대학교 시절에 중국에 관한 공부를 했다. 원래 중국을 방문하려 했으나 그 당시 개방이 안 돼 홍콩으로 향한 그는  1982년 영어 교사를 하면서 홍콩, 필리핀, 타이완, 일본을 거쳐 한국에 왔다. 그가 한국에 올 당시에는 한국을 소개하는 영문 자료가 많지 않아 한국이 더욱 신비롭게 여겨졌다고 한다.

한국에 와서 한 사찰을 방문한 것이 계기가 돼 산신에 대해 연구하게 됐다고 말하는 그는 “어느 나라보다도 한국은 유독 명산 숭배의 전통만은 아직도 생활의 곳곳에 자리를 지키고 있다”며 “한국문화 중심에 산신이 여전히 자리 잡고 있으며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탱하는 뿌리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산신도는 한국문화가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훌륭한 교량의 역할을 할 것”이라며 “한국 관광 홍보에 많은 도움이 되고, 한국의 관광 산업은 종교문화를 통해 움직임이 활발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는 “자신처럼 외국인들이 산신도의 인간적이고 자연주의적인 상징들을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라며 “그렇기에 외국인들이 한국의 산신도에 큰 매력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태고의 신앙은 단순히 살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모습으로 변천해 발달했다. 또한 산신은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중심에 있어 현 정부의 녹색성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산신’에서 한국의 문화적 통일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북한에서는 현재까지도 산신제가 진행되고 있다”는 말로 내비쳤다.

데이비드 메이슨 교수는 2001년부터 2005년까지 문화관광부에서 한국문화 안내가이드뿐만 아니라 한국문화 강의까지 맡아 외국인들에게 한국문화를 알리기도 했다. 현재는 경희대 호텔관광학부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문화를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문의) www.san-shi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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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9월 02일 (수) 21:15:54 김지윤 기자 jade@newscj.com
황손들만의 몫이 아닌 정부의 적극적 관심과 후원이 절실

   
▲ 창경궁 내부.

3년 전 유명세를 탔던 ‘궁’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만화가 박소희 작가의 동명 작품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드라마는 ‘대한민국이 입헌군주제라면…’이란 가상의 현실 아래 일어나는 일들을 ‘궁’이라는 전통적이고 폐쇄적인 19세기 아날로그 세계와 세속적이며 개방적인 21세기 디지털 세계를 절묘하게 조합해 성공적인 결과를 얻어냈다.

이 드라마로 인해 21세기를 사는 젊은이들은 왕실과 황태자, 황실 등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동명의 만화와 드라마에서처럼 대한민국이 아직 황실이 존재하는 입헌군주제라면, 만약 일제와 세계열강의 탄압이 없이 왕가의 맥이 끊어지지 않았다면 현재의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을 띄고 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과는 먼 이야기로만 느껴지고 아득한 옛날 옛적의 일로만 생각되는 우리나라 황실의 모습. 그렇지만 이 황실은 우리의 역사 속에 존재했었고 또 그리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다.

몇 해 전부터 역사를 재조명하는 사극이 안방을 차지했고, 또 젊은세대나 기성세대 할 것 없이 즐겨보는 드라마가 됐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네 역사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던 이 황실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으며, 또 이 황실이 남아있다면 지금의 우리 모습은 어떠했을까.

여기 황실을 재건해야 한다는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 역사 속에 사라져간 황실의 모습에 대해 한 번 그려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더불어 황실이 왜 재건돼야 하는지 또한 들어보자.



◆국호 ‘대한제국’은 민족의 위상을 높인 일

지난 2005년 고종황제 손자인 이구 황태손이 세상을 떠나면서 황실 존재가 이목을 끌었다.

당시 이구 황태손 사망 소식을 들은 국민은 중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떠올리며 애도했다. 아무리 시대가 변했으나 백여 년 전, 위엄이 서려있는 황실을 비춰 볼 때 호텔에서 마지막 일생을 보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안타까운 그의 죽음은 황실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신호탄이 됐고, 국민들이 황실에 대해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다.

고종이 사용한 ‘대한제국’은 자주성과 독립성을 한층 강하게 표방하기 위해 사용된 의례상·의전상 국호이다. 대한제국의 정식 국호는 ‘한(韓)’인데, 이는 동양의 전통 군주국가 체계 하에서 황제국은 통상 한 글자로, 제후국은 두 글자 이상으로 된 국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국호 ‘한’에 대외적 의미의 ‘대(大)’ 자를 앞에 추가하고, 국가의 단계를 의미하는 ‘제(帝)’ 자를 중간에 더하여 ‘대한제국’이 됐다. 일례로, 1899년 8월 17일에 반포된 대한제국의 헌법적 법전의 명칭은 ‘대한국 국제(大韓國 國制)’였다. 한국 또는 대한국을 대한제국이라고 표기하는 것에는, 민족적 자긍심을 드높이기 위한 측면이 강하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등으로 나라의 자주성이 크게 위협받게 되자 자주적 국가 수립을 염원하는 백성들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져 갔다. 이를 받아들인 고종은 1897년 8월 17일 ‘광무’란 연호를 쓰기 시작하고, 10월 3일 황제 칭호 건의를 수락했다.

고종은 자주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널리 표명하고 땅에 떨어진 나라의 위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국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했으며, 10월 12일 환구단에서 나라의 이름을 대한제국이라 하고 스스로 황제로 즉위했다.

대한제국이 선포되자 각국은 대한제국을 직접적·간접적으로 승인했다. 그 중 러시아와 프랑스는 황제가 직접 승인 축하했으며 영국, 미국, 독일 등도 간접적으로 승인 의사를 표시했다.

이렇듯 민족의 자긍심을 드높이고, 민족의 정체성을 바로세우기 위해 탄생한 대한제국은 안타깝게도 1910년 8월 29일까지만 존속됐다.

대한제국의 황실이 사라진 것은 이면적으로나 표면적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대한제국이라는 국호에서 보이는 것처럼 나라와 민족의 자긍심을 드높이려 했던 고종 황제의 생각과 뜻은 가히 존경받을 만하다.
그러나 고종, 순종, 영왕으로 이어지는 대한제국 황실의 역사는 우리에게서 잊혀진 지 오래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대한황실

   
▲ 고종황제 가족.

다시 말하지만 고종황제로부터 출범한 황실은 강대국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즉, 조선이 자주국가임을 외국에 알리기 위해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꿨던 것이다.

안천(서울교대) 교수는 자주국가임을 알렸던 대한황실이 사라진 이유로 일제침략과 맹목적으로 수입된 민주주의 이론을 꼽았다.

안 교수는 “황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큰 계기는 일제침략이다. 그 당시 일본은 정치 핵심인 황실을 가장 먼저 공격해 완전히 녹여 없애려고 일을 꾸몄다”며 “이승만 정권 시대 때 해외에서 맹목적으로 수입된 민주주의의 역기능 또한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고 분개했다.

그는 우리나라가 빼앗겼던 조국을 되찾을 때 일제침략자가 망쳐 놓은 문화에 미국의 것을 맹목적으로 옮겨놓으면서 우리의 본연을 잃게 됐다고 말했다. 특히 미국 교육제도가 우리에게 그대로 이식되면서 정신과 혼을 잃은 것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황실문화 복원을 위한 뚜렷한 정당성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흐르면서 황실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가지만 이러한 가운데서도 황실문화 복원 모임이 조용하게 일고 있다.

고종황제의 손자이자 의친왕 11번째 아들인 이석 황손을 주축으로 모인 ‘황실문화재단’이 대표적이다. 또 황실문화를 알리고자 이석 황실문화재단 총재의 차녀인 이진(본명 이지인) 원장은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황실예술원 진’을 만들었다.

황실문화재단과 황실예술원 진을 포함해 황실문화 복원에 뜻을 둔 사람들이 밝힌 ‘황실문화 복원의 정당성’은 한결같다.

안천 교수는 황실이라는 매개체가 민족을 한마음 한뜻으로 뭉치게 만들고, 잃어버린 어른문화를 회복할 수 있다며 정당성을 설명했다.

그 외에도 ▲원만한 민주문화 수립 ▲신생국 사고 탈피 ▲애국선열 의지 구현 ▲민족통일의 기본준거 ▲정치문화의 한국화 ▲관광입국의 대들보로 나눠 설명했다.

이석 총재 역시 안 교수와 뜻을 같이 했다. 이 총재는 전통과 역사관을 바로잡기 위해 상징적인 황실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영국·벨기에 등 황실국가가 있는 나라는 국가 정체성과 전통이 살아있다”고 말했다.

이진 원장은 황실문화 복원에 대해 “그 시대 고급문화 집합소를 역사 속에 흘려보내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며 “황실문화 복원은 황손들만 나서서 되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적극적인 관심과 후원이 있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앞에서 말한 바 황실문화가 미치는 영향은 대외적으로 위상을 드높일 수 있고 국민 정서에도 긍정적이다.

또 최근 동의보감이 유네스코에 등재되는 등 우리 것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이때에 황실문화가 복원된다면 지금보다 수준 높은 문화강국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대한제국 황실 연구만 20여년
안천 서울교대 교수 인터뷰

   
▲ 서울교대 안천 교수.
서울교대 안천 교수는 사라진 대한황실의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 20여년이 넘는 시간을 황실 재건과 황실 후손들을 찾아다니는 데 쏟았다.

안 교수는 교수 초년 시절, 정치학 강의를 하면서 왜 우리 것은 없는지 의문이 들었다며, 우리의 기나긴 역사가 일제에 의해 끊겨 공백이 생겼는데 그것을 미국의 제도가 대신한 것에 안타까움을 느꼈다고 한다.

이것을 계기로 황실연구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는 안 교수는 “500년 역사의 대한황실처럼 당당히 이어졌던 황실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기 어렵다”며 “다만 일제침략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해 민족의 구심점을 잃고, 나라의 어른을 상실한 채 방황하고 있는 게 우리의 현대 정치사”라고 말했다.

그는 “일제침략으로 끊어진 황실 역사는 결코 부끄러운 역사만은 아니다”면서 “일제 식민사관에 의해 오도되고 왜곡된 채 버려져 있을 뿐 분명히 살아있다”고 강조했다.

안 교수의 황실연구는 소설 ‘왕조의 후예(삼신각)’를 쓴 강용자 경향신문 전 논설위원과 ‘노래하는 황손’ 이석 씨를 만난 것이 기폭제가 됐다.

세 사람의 의기투합으로 1991년 ‘대한황실복원추진준비위원회’가 만들어졌으며, 1992년 2월 대한황실복원추진회를 시작으로 지금의 황실문화재단이 탄생하게 됐다.

안 교수의 황실복원에 대한 열정은 그의 사재를 다 헐어 연구에 임할 정도로 뜨거웠다. ‘황실을 복원해 임금님을 다시 모셔야 한다’는 일념으로 쏟아낸 안 교수의 연구 논문들은 서양 민주주의와 정치체제에 길들여져 있는 관점에서는 하나의 ‘학문적 도전’이었다.

안 교수는 황실이 역사 기록에서 사라지고, 버려진 이유로 일제의 식민사관과 황국사관, 친일사관, 당시 정권의 황실 탄압 등을 지목했다.

그에 따르면 “일본은 우리 민족의 구심점이자 정치핵이었던 황실을 별볼일 없고 무능, 무력, 부패한 존재로 교묘하게 유도하고 선전함으로써 국민 스스로가 황실을 매도하고 자기 역사를 부정하게 하는 간교한 정책”을 쓴 것이다.

안 교수는 “그동안 우리 학교에서는 일본의 선전인 줄도 모르고 우리가 일본에 36년간 망했다는 등의 허망한 역사를 가르쳐왔다. 황실도 마찬가지”라며 “역사인식의 주체를 바꿔서 보면 우리 민족은 36년간 망한 것이 아니라 36년간 침략자들과 혈전을 펴며 쫓아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황실에 대한 사랑은 황실복원에 대한 많은 논문들을 낳았고 더 나아가 황실복원 운동의 불씨를 지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황실복원 작업은 ‘진행형’임이 아쉬운 부분으로 남는다. 그렇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의 열정과 노력의 산물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안 교수가 황실복원의 정당성으로 내걸었던 민족을 한마음 한뜻으로 뭉치게 하는 매개체, 잃어버린 어른문화의 회복, 원만한 민주문화 수립 등은 현 사회에 꼭 필요한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혹여 황실복원이 난관에 부딪히더라도 황실문화가 갖는 이점(利點)은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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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동안 잃어버린 땅 ‘간도’

사회기획 2009/09/07 10:25 Posted by 뉴스(news) 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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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9월 02일 (수) 06:17:02 임문식 기자 usk@newscj.com

올해 9월 4일은 청나라와 일본이 간도협약을 체결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다른 때보다 간도에 대한 관심이 높이지고 있는 요즘, 간도 되찾기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돼 주목을 받고 있다.

간도되찾기운동본부(대표 육락현)는 지난 4월 국회에서 간도 관련 학술대회를 연 데 이어 7월에는 대학생 전국 간도알리기 순례단을 발족하는 등 숨 가쁜 일정을 보냈다.

부산 지역의 ‘반크’ 동아리 고교생들도 지난달 15일 간도 되찾기 캠페인을 벌여 간도협약의 부당성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일부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간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 같은 움직임의 배경에는 간도협약 이후 중국의 간도 지배 기간이 100년이 경과할 경우 국제관례상 영토 소송에서 불리할 것이라는 인식이 작용한 측면도 있다.

   
▲ 1779년 산티니가 제작한 프랑스 고지도에는 간도가 한국 영토로 표시돼 있다. ⓒ뉴스천지
 

◆청일 간도협약으로 빼앗긴 삶의 터전

해방은 됐으나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은 땅 간도는 한때 우리 선조들이 피땀 흘려 밭을 일구던 삶의 터전이었다.

1870년경부터 두만강 유역의 삼각주를 개간하기 시작한 조선인들은 이곳을 간도(間島)로 불렀다.

조선과 청나라 사이 간도분쟁의 씨앗은 청의 제안으로 백두산 기슭에 세워진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였다. 1883년 조선은 정계비문 중 ‘서쪽은 압록으로 동쪽은 토문으로’를 근거로 간도가 조선의 땅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청은 토문강을 두만강이라면서 청나라 땅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정계비를 놓고 조선과 청이 갈등을 빚고 있는 상황에서 청일전쟁을 치룬 일본은 남만주철도부설권 등 이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협약을 맺어 간도를 청에 넘겨버리는 만행을 저지른다. 백두산정계비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자취를 감췄다.

 

◆을사조약에 따른 간도협약은 무효

간도협약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일본이 조선을 대신해 청과 교섭을 진행했던 근거인 을사조약 자체가 무효이기 때문에 간도협약도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또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했는데도 간도가 협약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지 않은 것은 1943년 카이로선언, 1945년 포츠담선언에 위배되는 사안이라는 게 간도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은 1951년 체결한 중일(中日)평화조약 제4조에서 “중일 양국은 전쟁의 결과로서 1941년 12월 9일 이전에 체결한 모든 조약·협약 및 협정을 무효로 한다”고 규정한 바 있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은 외교통상부 재임 시절인 2004년 10월 “간도협약은 법리적인 측면에서 무효”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그는 “간도협약 문제와 간도 영유권 문제는 분리해서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간도 문제는 자칫 중국과의 큰 마찰로 이어질 수 있으니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간도, 100년 지나면 정말 못 찾나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간도협약 100년 시효설에 대해 김명기(전 대한국제법학회 회장) 명지대 명예교수는 “간도협약 시효설에 따라 우리가 간도에 대한 주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역설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국제법 학자들은 시효기간을 몇 년이라고 규정하지 않고 있고, 100년 시효설은 1600년대 유럽에서 활동한 국제법 학자 ‘그로티우스(Grotius, 1583~1645)’가 주장한 이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토분쟁과 관련한 국제재판소의 판례 경향을 살펴보면 시효기간보다는 관계국의 ‘이의제기’ 없이 평화적·계속적으로 주권을 행사해왔는지를 강조하고 있는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간도, 왜 우리 땅인가?

먼저,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선은 압록강, 두만강이 아니며 모두 그 이북에 위치해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을 표시한 여러 지도를 살펴보면 간도가 우리 땅임이 증명된다.

프랑스인 지도 제작자 레지의 비망록에는 “봉황성의 동방에는 조선국의 국경이 있다”고 나와 있다. 또 ‘조선정계비구역약도(규장각15504)’ ‘백두산정계비도(규장각26676)’에 의하면 동간도는 토문강 이동 지역임을 알 수 있다.

1718년 청나라의 황여전람도를 원본으로 한 수많은 서양지도 중 당빌의 조선왕국지도와 1740년 듀알드, 1750년 보곤디, 1794년 월킨스가 각각 제작한 지도에는 압록강 강북의 봉황성 일대에서 두만강 위쪽의 연길 일대로 이어지는 동간도 지역으로 국경 표시가 돼 있다. 이와 같은 국경선은 1909년 간도협약이 체결되기까지 유효했다.

두 번째로, 우리가 간도를 선점적으로 개간했다는 점이다. 청나라와 조선이 1627년 맺은 강도회맹에 의해 봉금지역이 된 간도지역은 무주지로서 양국이 공동 관리하는 지역이었다. 무주지는 국제법적으로 먼저 선점해 개간하는 쪽이 영유권을 가지게 된다.

세 번째로, 조선 조정에서 실질적인 행정 권력을 행사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정계비 건립 이후에도 간도는 조선에서 실질적으로 행정 권력을 행사했다. 조선 조정에서 1900년, 1903년에 서간도 및 동간도(북간도)를 행정적으로 평안북도 및 함경도에 편입시켰으며 주민에게 세금을 징수해 행정과 군인훈련비로 충당했다.

또한 이 지역에 대한 치안 및 경배를 수행했고 조선 관병들이 중국의 유민 침투를 저지하기도 했다. 이는 명백히 국가의 행정단위로써 기능을 했다는 증거이다.

마지막으로 간도에 대한 역사적 연고를 살펴보면 고조선, 고구려, 발해 등 반만년의 역사 중 우리민족이 3300년이 넘게 지배했다.

고려시대 윤관 장군은 9성을 개척하고 두만강 북쪽 700리의 공험진의 선춘령에 국경비를 세웠다.
공민왕은 1370년 이성계로 하여금 압록강을 건너 동녕부(요양, 심양지역)를 정벌토록 해 우라산성을 함락시키고 그 일대를 장악하기도 했다.

※출처: 간도되찾기운동본부, 북방민족나눔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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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손들만의 몫이 아닌 정부의 적극적 관심과 후원이 절실

   
▲ 창경궁 내부.

3년 전 유명세를 탔던 ‘궁’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만화가 박소희 작가의 동명 작품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드라마는 ‘대한민국이 입헌군주제라면…’이란 가상의 현실 아래 일어나는 일들을 ‘궁’이라는 전통적이고 폐쇄적인 19세기 아날로그 세계와 세속적이며 개방적인 21세기 디지털 세계를 절묘하게 조합해 성공적인 결과를 얻어냈다.

이 드라마로 인해 21세기를 사는 젊은이들은 왕실과 황태자, 황실 등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동명의 만화와 드라마에서처럼 대한민국이 아직 황실이 존재하는 입헌군주제라면, 만약 일제와 세계열강의 탄압이 없이 왕가의 맥이 끊어지지 않았다면 현재의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을 띄고 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과는 먼 이야기로만 느껴지고 아득한 옛날 옛적의 일로만 생각되는 우리나라 황실의 모습. 그렇지만 이 황실은 우리의 역사 속에 존재했었고 또 그리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다.

몇 해 전부터 역사를 재조명하는 사극이 안방을 차지했고, 또 젊은세대나 기성세대 할 것 없이 즐겨보는 드라마가 됐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네 역사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던 이 황실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으며, 또 이 황실이 남아있다면 지금의 우리 모습은 어떠했을까.

여기 황실을 재건해야 한다는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 역사 속에 사라져간 황실의 모습에 대해 한 번 그려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더불어 황실이 왜 재건돼야 하는지 또한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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